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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런 (Run_ 2020)

by 저녁그림자 2021. 7. 10.
Now, Open your mouth!
감독: 아나쉬 차간티
주연: 사라 폴슨 (다이앤), 키에라 앨런 (클로이)

단 한 장면의 힘.

그냥 어떤 한 장면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해버리는 영화가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별 것 아닌 장면인 것도 같은데,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금 실망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영화의 마지막에 클로이가 "Now, Open your mouth!"라고 말하는 순간, 그냥 다른 모든 것들을 용서해 버렸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고 그래서 이 글은 전체가 결말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영화를 볼 생각이 있다면 읽지 않는 게 좋겠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비뚤어진 모정, 영아 납치, 집착과 광기,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어디에서 본 듯한 조금은 뻔한 설정과 클리셰들을 특별히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내내 그냥 드러내 보인다. 자꾸 보지도 않은 앞장면이 먼저 떠오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은 왠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은밀하게, 그래서 더욱 통쾌하고 짜릿하게 세련된 복수로 끝을 맺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포스터계의 주접왕. 오버가 심하다.

색다른 화해.

의사가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친부모도 찾고,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클로이는 그러나 끝내 제대로 걸을 수는 없다. 그 오랜 세월 마비된 채 누워 있었으니, 7년이 지났다 해도 하이힐이라도 신고 또각또각 걸어서 교도소로 들어갔다면 오히려 마지막 장면이 불편해졌을 것이다. 그녀의 걸음에서 열심히 재활을 했을 것이 느껴지지만, 여전히 제대로 걸을 수 없어야만 클로이가 입 안에 숨겨 들어온 알약은 의미를 갖는다.

 

누워 있는 엄마에게 이런저런 일상의 일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도대체 쟤 왜저래? 뭐하는 거야? 용서와 화해 같은 걸로 끝난다고?' 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는 '왜 이러긴.' 이라고 대답하듯 빙긋 웃으며 말한다, '입을 열라'고. 그리고 다이앤이 자신에게 먹였던 바로 그 초록색 (강아지용) 알약을 입안에서 뱉어낸다. 의사가 되었으니 다이앤처럼 약을 구하려고 처방전을 조작하는 수고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중증장애인 딸을 애지중지 정성껏 키우며 받았을 찬사는 아마도 클로이에게로 진작 옮겨갔을 것이다. 방문한 클로이를 대하는 간수들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다.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고 오랜시간 자신을 학대한 다이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고, 심지어 주기적으로 따뜻한 방문을 하는 훌륭한 클로이.

 

다이앤은 어쩌면 결국 자신과 비슷한 아이를 키워냈는지도 모르겠다.

은근 닮았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겠지만.

나는 클로이의 반격이 마음에 든다.

범죄자가 법의 심판을 받는다고 나의 고통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클로이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 못하고, 그녀의 분노는 치유되지 않았다. 받은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하고, 다만 우리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혹은 그러면 안 된다고 교육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아니면 똑같이 범죄자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을 뿐 아닌가?

클로이가 택한 방식의 세련됨이 마음에 든다.

용서가 미덕이고 복수는 어리석다고 평생 배우고 다짐해도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어서, 내 안의 사악함은 그런 식으로라도 대리만족이 필요하다. 손톱 밑을 하루에 열번씩 손톱깎이로 꽉 찝는다거나, 날카로운 바늘로 가득찬 주머니에 집어넣고 세차게 흔든다거나 뭐 그런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형벌은 무엇일까 상상해보게 하는 범죄들이 뉴스에서 들려올 때마다 생각한다. 누군가는 속시원하게 복수를 했다더라, 라는 소식이 픽션일지라도 가끔은 필요하다. 어쩌면 막장이라도 욕을 먹으면서도 복수를 주제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사람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느끼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p.s.

키에라 앨런의 휠체어 연기가 놀랍게 자연스럽다. 연습을 얼마나 했을까.

극장들이 겨우 조금씩 영업을 재개할 때 개봉했고, 코로나 상황 이후 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그때는 극장에 진짜로 사람이 없었고, 같이 온 사람이라도 강제적으로 한 칸씩 떨어져 앉아야 했고, 음식 섭취를 완전히 금지했는데 세상에, 관람 환경이 너무나 쾌적했다. 상황이 나아져도 계속 이렇게 운영하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최근에는 2명, 3명까지는 옆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예매가 되기도 하고 사람도 꽤 많이 늘어나서 극장에 조금씩 활기가 도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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