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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 (Laputa: Castle in the sky_ 1986)

by 저녁그림자 2021. 7. 10.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와 함께 겨울을 나고 새들과 함께 봄을 노래하자.

OST: 너를 태우고

진짜 옛날 일인데 아주 오랫동안 내 휴대폰 벨소리였던 이 영화의 주제곡 '너를 태우고'.

16 POLY 벨소리는 마치 이 곡의 오르골 버전처럼 들렸었다.

너무 오래 들었던 곡이라 영화를 봤다고, 심지어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사실 영화는 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가끔 너무 유명해서 당연히 읽었을 거라고 착각하는 책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의 영화 버전이랄까.. 심지어 영화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흘러나오는 이 곡에는 가사도 있는데 가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영화에서 주로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버전도 생소했고, 아무튼 '영화는 안 봤다'는 걸 깨닫고 오래오래 별러온 이 작품을 드디어 보았다. 숙제 하나 끝낸 기분.

 

미야자키 하야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우리나라는 일본 문화 수입 규제 때문에 아주 뒤늦게 정식 수입이 되었는데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게 무려 1986년이다. 전두환 정권 때.

실제와 환상이 묘하게 얽힌 배경 때문인지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포스터는 좀 촌스럽다. 시타는 알라딘 바지를 입고 다닌다.

라퓨타는 왜 망했을까?

비행석 결정체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인 라퓨타 주민들은 그 힘으로 자신들의 성을 공중에 띄우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땅에 남은 사람들을 다스렸다. 수많은 괴물 로봇을 부리고, 미로같은 성을 설계할 만큼 뛰어난 과학기술을 가졌던 그들은 왜 남은 왕족을 둘로 갈라 지상에 내려보내고 하늘의 성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걸까?

시타는 이 질문에 고향에서 전해내려오는 노래로 답한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이제 폐허가 되어버린 천공의 성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란다. 나무의 뿌리는 땅에 닿지 못하는 대신 성 전체를 삼키고 로봇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땅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성을 모두 집어삼키는 동안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천공의 성에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거나 사람이 아닌 로봇들만 남아 있다.

백성들을 모두 잃고도 차마 멸망의 주문을 외울 수는 없었던 왕족의 욕심이 라퓨타의 전설을 만들었고, 시타는 그 욕심을 향해 "나라가 망했는데 왕만 살아 있다니 말이 안 된다"라고 호통친다.

라퓨타로 가다.

파즈의 아버지는 라퓨타를 발견하고 사진까지 찍었지만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기꾼 소리를 들으며 살다가 죽었다. 파즈는 그래서 라퓨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꼭 확인하고 싶다.

시타는 가문으로부터 배경석 목걸이를 물려받으며 숨겨진 이름도 함께 받았다. 루시타, 우르 라퓨타.

시타는 라퓨타와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만 그래도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다.

도라는 해적이다. 전설에 따르면 라퓨타에는 수많은 보물이 있다고 하고, 해적은 원래 보물을 쫓는 것이므로 당연히 라퓨타의 보물을 확인하고 싶다.

또다른 왕족 무스카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지, 라퓨타를 되찾고 스스로 세상의 왕이 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다.

(확인하고 싶은) 저마다의 것들을 가지고 이들이 라퓨타로 향한다.

 

라퓨타에 도착하다. 시타와 파즈

움베르토 에코의 동화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에는 지구인들이 무섭게 생긴 화성인을 공격하려다가 땅에 떨어진 새를 보고 슬퍼하며 감싸 안아주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라퓨타에서 처음으로 만난 괴물 로봇과 시타, 파즈가 똑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새둥지 위로 착륙한 비행선을 치우고 새알의 안위를 살피며 그들은 신뢰와 측은지심을 동시에 갖는다. 괴물 로봇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시타를 영화 내내 계속 지켜주던 로봇이었고, 괴물은 괴물이라고 부르기로 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어딘가에..

2층 정원을 지키는 로봇들과 지하에 잠들어 있던 로봇들은 분명 같은 로봇들인데 정원로봇이 새와 다람쥐와 꽃과 보내는 평화로운 일상이 지하의 로봇들에게는 없다. 무스카의 명령으로 깨어난 그들은 류시타의 침입자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아니면 반대로 처음부터 공격자로 만들어져 평화로움 따위는 없던 로봇이 정원에 살기 시작하면서 새와 다람쥐와 친구 맺고, 무덤에 꽃을 바치는 감수성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선후관계가 어떻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삶, 자연을 해치지 않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야오 감독의 메시지는 첫 장편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보다.

 

멸망의 주문으로 성의 기계장치는 모두 파괴되었지만 뿌리가 단단한 커다란 나무와 그 나무에 붙박인 것들은 살아남아 여전히 비행을 계속한다. 새들을 어깨에 얹은 로봇이 정원을 걷는 마지막이 너무 평화롭고 쓸쓸해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들이 내내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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