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혼으로 시작하는 결혼이야기
영화는 니콜의 장점을 말하는 찰리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이혼 전 조정절차로 찾은 부부 상담센터에서 니콜은 끝내 적어온 찰리의 장점을 낭독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 영화는 가볍게 이야기하자면 전도유망했던 여자 배우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하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렸다가 이혼과 함께 다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반대편에서 보면, 재능 있는 남자가 이른 결혼을 통해 안정과 생기를 얻고, 그 기운으로 커리어를 쌓고 원하는 대로 승승장구하며 바람도 피우고 살다가, 끝내 이혼을 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자의 결혼과 남자의 결혼, 여자의 육아와 남자의 육아, 여자의 일과 남자의 일.
그 차이와 괴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그리고 능력만 있으면 끝까지 이기적이어도 괜찮았던 남자들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 니콜
극 초반 변호사 노라에게 "그에게 나는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었다."고 말하며 울던 니콜은 영화가 끝날 때쯤 시상식 수상 후보에 오르고 '당신은 훌륭한 배우니까'라고 말하는 찰리를 보며 "아니, 감독상 후보야."라고 멋지게 한방을 날린다.
결혼 생활 내내 그녀의 재능과 능력을 한정 짓고 확장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찰리는 이혼 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이제야 당신이 왜 그렇게 미쳐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고 말하는 니콜의 표정엔 살며시 경멸의 감정이 스친다.
니콜을 독려하고 격려하며 명대사를 쏟아낸 변호사 노라 역의 로라 던은 그 해 수많은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는데 개인적으로 로라 던의 연기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고, 니콜을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스칼릿 조핸슨)의 감정 표현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당황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외출 뒤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굿나잇 인사를 하고 소파 뒤를 돌아 들어가며 투두둑 떨어진 그녀의 눈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찰리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서는 기꺼이 가족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에 머물 수 있었던 찰리는 LA에서 살기로 했던 결혼 당시의 약속을 장식장 놓을 위치를 '상의'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고,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니콜의 요청은 늘 다음으로 미루면서도 그녀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자신의 작품에 무상으로 사용하고, 함께 일하는 무대감독과 외도를 하면서 니콜에게 새롭게 찾아온 기회는 TV쇼라 무시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출연료는 극단 예산으로 쓰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면 찰리는 극단적으로 나쁜 사람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찰리는 천하의 나쁜 놈이 아니라 그냥 이기적인 평범한 남편이고, 어쩌면 이기적이어서 평범한 남편일 뿐이다.
노라의 말대로 그저 우리가 '불완전한 아버지(imperfect dad)'에게 관대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아들의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LA에 집을 구하고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는 익숙한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라 애잔해지기도 한다.
찰리는 영화 내내 답답할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촬영이 끝나면 뉴욕으로 돌아올 거라고, 가족의 기반은 뉴욕이라고 끝까지 우기던 찰리가 결국 마지막엔 LA에서 일할 기회를 잡고, LA로 이사를 왔다고 말할 때 니콜의 표정은 복잡하다.
니콜에게 이미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찰리의 표정도 복잡하다.
늦어버린 참회는 여러모로 복잡하다.
4. 끝
나의 커리어를 망치고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 아니, 나의 커리어를 본인이 망쳤는지 모르기 때문에 미안해할 수도 없었던 사람,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자기가 이기적인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장점'을 찾아내 줘야 지킬 수 것이 결혼이고, 영화의 시작에서 절대로 낭독하지 않겠다던 니콜의 선언은 그런 '결혼'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담센터에서 끝내 읽기를 거부했던 니콜이 적은 찰리의 장점은 영화의 마지막에 아들 헨리의 목소리로, 이어서 찰리 자신의 목소리로 낭독된다. 니콜에게 훌륭한 커리어가 생기고,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기고, LA에서 충분한 기반을 닦고, 그렇게 모든 게 늦어버린 다음에.
찰리 스스로도 몰랐고 영화 내내 관객들도 몰랐던 그의 장점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결혼의 의미처럼 영화가 끝날 때서야 쓸쓸한 독백이 되어 울려 퍼진다.
나빠서 끝난 것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끝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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