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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비정전 _ 1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

by 저녁그림자 2021. 7. 5.

 

빰빰빰빰빰빰♬

1. 너무나 유명한 두 장면

  1.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 시계를 본다. 그리고 그 유명한 대사.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2. 하비에르 쿠가의 "Maria Elena"에 맞춰 아비가 맘보춤을 춘다. 빰.빰빰빰빰!

2017 재개봉 포스터

특별히 왕가위가 아니더라도 홍콩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 두 장면으로만 이 영화를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다시 보기 전까지 이 영화가 장국영과 장만옥의 로맨스 영화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어떤 오해를 가진 상태로 영화를 보는 건 의외로 좋은 경험이다.

모든 영화가 반전 영화가 되는 경험이랄까.

2. 그 시절의 홍콩 영화.

1990년대 홍콩 영화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미국 영화는 생소했고, 일본 영화는 금지되어 있었으며 한국 영화는 수준이 좀 어설펐던 그 시절, 홍콩 영화는 거의 유일한 '빛'이었다. 그때는 주성치를 조금 더 좋아했었는데 그래도 그 빛들 중 가장 반짝였던 건 장국영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에 장국영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으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요즘 유덕화, 주윤발이 너무나 멋있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장국영은 어떻게 나이 들어갔을까 문득 궁금해지다가도 고개를 젓는다. 그의 늙은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때의 장국영은 너무 예뻐서 어떤 헛소리를 해도 용서가 됐었다.

오늘 밤 꿈에서 자신을 만날 거라던 아비.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한숨도 못 잤기 때문이라던 아비. 

아비는 이기적이고 유치하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아이들이 그렇듯이..

배고프면 울고, 원하는 게 있으면 떼쓰고, 졸리면 자고, 가고 싶은 곳으로 훌훌 걸어가버리고, 그런데도 미워할 수는 없고.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은 안다.

아비는 그저 '덜 자란 어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정말 답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루루와 수리진은 그런 아비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저 맴돈다. 지금 기준으로는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지만 그냥 장국영이 연기하는 아비는 다 이해해줘야 할 것만 같다.

 

 

풋풋한 전성기 때의 유덕화, 장학우, 양조위, 장만옥, 유가령. 그들이 연기하는 청춘은 반짝반짝 빛나고 동시에 위태롭다.

그 시절의 홍콩의 상황처럼, 그 시절의 홍콩 영화처럼.

 

그때는 몰랐는데 그 시절의 홍콩 영화들은 묘하게 독특한 세기말적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물론 실제로 세기말이었으니 당연하지만, 홍콩 영화들은 그 분위기와 시기가 묘하게 다르다.

세기말적 영화가 쏟아져 나온 건 주로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인데, 90년대 초반에 홍콩영화들은 이미 그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다.

허무하면서도, 자유분방하면서도, 뭔가를 포기한 듯도 하고, 뭔가를 새로 쌓아 올려 보려는 듯도 하고.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분위기에 더해 그 시절의 홍콩영화와 그 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불안정한데 아비정전의 인물들은 그 불안정의 꼭대기에 있다.

 

1997년 중국으로의 반환을 앞둔 홍콩 사람들은 확실히 세계보다 먼저 세기말을 겪고 있었다.

영국의 홍콩이 끝나고 중국의 홍콩이 시작될 때, 그들은 2020년, 2021년 지금 홍콩의 참담한 사태를 조금은 예견했을까.

홍콩 영화는 이후 20년간 추락을 계속했고, 이제는 '홍콩 영화'라는 것 자체가 없다. 슬픈 일이다.

장국영이 살아 있었으면 그 여린 성정으로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있었을까.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3. 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비는 '다리 없는 새' 이야기를 즐겨한다.

다리가 없어 끊임없이 날아야 하는 새. 죽을 때 단 한 번 땅에 닿을 수 있는 새. 

뿌리를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말이기도 하면서 당시 홍콩 사람들의 불안한 상황을 묘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덕화는 그런 그에게 '어리광'부리지 말라고 일침을 날리는데 이건 왕가위가 홍콩 사람들에게 날리는 일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안해도 삶은 변함없이 계속되니까..

 

수리진은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극 중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유덕화가 이미 선원이 되어 떠나버린 후에.

수리진도 우리도 끝내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전화벨은 1분 정도 울린 뒤 멈춘다.

아비가 수리진에게 남긴 1분, 그리고 받지 못할 벨이 울리던 1분.

뒷날을 영원히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1분들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이 존재할까.

어쩌면 모든 1분, 1분들이 그럴지도.

 

마지막에 양조위 깜짝 등장

 

원래 2부작으로 기획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면 '도대체 이 결말은 뭘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등장한 양조위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자꾸 돌려봤다. 천장이 낮아 일어설 수도 없는 골방에 살면서도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기고 손톱을 파일로 갈아 정리하고 멋진 수트를 입고 정성스레 외출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또 다른 세기말 풍경이 느껴진다. 밖으로 나선 그의 삶이 너무나 궁금해 끝내 제작되지 못한 2부가 두고두고 아쉽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1분들을 만들며 살아갔을까.

세기말이 끝나고 21세기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지만, 그가 남긴 1분 만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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